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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비극,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 사건' 살펴보기

by $#%%#$ 2024. 2. 6.

조선의 비극,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진상 규명

개요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나고 갑오개혁을 일으키며 내정 개혁을 주도하던 일본의 이노우에 공사는 갑오개혁 실패와 삼국(러시아, 프랑스, 독일) 간섭 속에서 일본의 국제적 위상이 저하되자 조선에서의 주도권 행사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300만 엔 차관' 제공 등의 회유책을 시도했지만,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하면서 이 또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1895년 7월 조선에 친러파 정권이 성립되었고, 이에 반발한 일본은 주재 공사를 미우라 고로 육군 중장으로 교체하며 대원군을 이용한 친일파 정권 부활을 위한 쿠데타를 계획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비극적으로 흘러간 사건이 바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입니다.

한국 학계의 시선

한국 학계에서는 이 사건의 주범으로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은 이노우에 공사를 지목하며, 미우라 공사를 단순하고 무지한 군인이자 이노우에 공사의 하수인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일본 정부의 지시 및 교사 여부는 아직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사건의 주범은 미우라 고로라는 점입니다. 미우라 고로는 당시 조선에 있던 일본의 군인, 외무성 경찰, 외교관 그리고 우익인 현양사 계열의 조선 낭인을 지휘하였습니다.

또한,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서 일본군 장교와 조선 낭인이 함께 참여하였지만, 이를 은폐하고 일본의 우익 민간인들이 독단으로 행한 것처럼 표현하였으며, 이들은 한국 합병 후에 자신들의 공로를 과시하며 자랑하였습니다.

일본은 친일 정권 부활을 위한 궁중 쿠데타가 중요 과제였으며,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고종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는 방식으로 명성황후 시해라는 극단적인 수단이 채택되었습니다. 또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관여한 인물들 중에서는 '게이오 출신' 우익의 움직임이 시해 사건 1년 전에 발생한 김옥균의 암살 사건과 묘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주목됩니다.

맺음말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단순한 국가 간의 갈등을 넘어, 역사적 진실을 향한 탐구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사건입니다.

명성황후는 사후 고종이 황제국으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후로 추숭되었습다.

조선 제26대 고종의 왕비,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참고문헌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이종각, 메이치미디어, 2015)
『명성황후 최후의 날: 서양인 사바찐이 목격한 을미사변, 그 하루의 기억』(김영수, 말글빛냄, 2014)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김문자 저·김승일 역, 태학사, 2011)
『명성황후 편지글』(이기대 편저, 다운샘, 2007)
『명성황후 시해사건 러시아 비밀문서』(이영숙, 서림재, 2006)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이민원, 국학자료원, 2002)